
공구 살 순서 — 첫 10만원, 다음 10만원
공구는 세트로 한 번에 사는 게 아니라, 자주 하는 일 순서대로 늘려가는 겁니다. 없으면 시작이 안 되는 첫 10만원, 손이 아쉬울 때 채우는 다음 10만원, 그리고 빌리는 게 나은 공구와 꼭 사야 하는 공구를 현장 기준으로 나눠 정리했습니다.
철물점이나 자재상에서 제일 자주 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제 막 집수리에 재미가 붙은 분이 손잡이 달린 커다란 공구 세트를 들고 계산대 앞에 서 있는 겁니다. 마음은 압니다. 저도 처음엔 그랬으니까요. 그런데 반년쯤 지나 그 가방을 열어보면, 손때가 묻은 건 드라이버 두 자루와 줄자뿐인 경우가 흔합니다. 나머지는 자리만 차지하다가 이사할 때 버려집니다.
공구는 한 번에 갖추는 물건이 아닙니다. 자기가 실제로 자주 하게 되는 일 순서대로 늘려가는 물건입니다. 15년 동안 현장에서 제 공구가방이 어떻게 채워졌는지 되짚어 보면, 결국 그 순서였습니다.
가격은 지역·판매처·등급에 따라 크게 달라지니, 아래의 '10만원'은 정확한 금액이라기보다 한 번에 지출할 묶음의 크기 정도로 봐주시면 됩니다.

세트부터 사면 생기는 세 가지 일
첫째, 안 쓰는 공구가 대부분입니다. 대형 세트는 가짓수로 만족감을 주는 상품이지, 사용 빈도로 구성된 상품이 아닙니다.
둘째, 같은 값이면 품질이 분산됩니다. 일반적으로 가짓수를 맞추다 보면 개별 공구 하나하나에 들어가는 값은 내려갑니다. 정작 자주 쓰는 드라이버 한 자루가 가장 아쉬운 물건이 되기 쉽습니다.
셋째, 이게 제일 위험한데 — 공구가 손에 있으면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 손이 갑니다. 스패너가 있으니 가스배관 너트를 조여보고 싶고, 드라이버가 있으니 두꺼비집 안을 열어보고 싶어집니다. 공구가 일을 정하게 두면 안 됩니다. 일이 공구를 정해야 합니다.
첫 10만원 — 없으면 시작이 안 되는 것들
이 단계의 기준은 딱 하나입니다. "이게 없으면 아예 손을 못 대는가."
- 드라이버: 십자·일자를 각각 두세 사이즈. 집에서 벌어지는 일의 절반 이상은 나사 하나 풀고 조이는 일입니다. 손잡이가 굵고 미끄럽지 않은 것으로 고르세요.
- 플라이어 두 자루: 가는 것을 집는 롱노즈 하나, 수전·배관 너트를 무는 워터펌프 플라이어(또는 몽키스패너) 하나.
- 줄자 5m: 가구 들이기 전 실측만 제대로 해도 반품·재구매 비용을 아낍니다.
- 커터칼과 여분 날: 날은 아끼지 마세요. 무딘 날이 더 위험합니다. 안 잘리니까 힘을 주게 되고, 그때 손이 나갑니다.
- 비접촉 검전기(전압 테스터): 이게 첫 묶음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는 '공구'라서가 아니라 '판단 도구'라서입니다. 조명이나 콘센트 커버를 만지기 전에 전원이 정말 끊겼는지 확인하는 물건입니다.
- 헤드랜턴 또는 작업등: 싱크대 밑, 천장 속, 차단기를 내린 뒤의 어둠. 한 손이라도 더 쓰려면 머리에 쓰는 형태가 낫습니다.
- 남는 잔액으로 짧은 수평자, 마스킹테이프, 절연테이프, 작업장갑.
여기까지면 형광등·LED 교체, 커버 교체, 수전 누수 점검, 배수구 청소, 가구 조립처럼 빈도 높은 일의 대부분을 커버합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실제로 손에 잡히는 건 평생 이것들입니다.

다음 10만원 — 손이 아쉬워졌을 때 사는 것
두 번째 지출은 날짜로 정하지 말고 감각으로 정하세요. 첫 묶음으로 대여섯 번 일을 해보면, "이게 있었으면 30분은 아꼈겠다" 싶은 지점이 스스로 보입니다. 그때가 살 때입니다.
- 충전 드릴드라이버: 가벼운 등급으로도 가구 조립, 석고보드 앵커, 커튼 브래킷은 대부분 됩니다. 콘크리트를 뚫겠다고 처음부터 무거운 걸 사면, 무거워서 안 꺼내게 됩니다.
- 비트 세트: 드라이버비트와 목재·철재용 드릴비트. 콘크리트용은 성격이 다르니 뒤에서 따로 이야기하겠습니다.
- 실리콘건과 헤라·스크레이퍼, 실리콘 제거칼: 욕실 실리콘을 한 번이라도 다시 쏠 생각이면 이 조합이 필요합니다.
- 배관 소모품: 생테이프(배관용 실링테이프), 여분 패킹. 부피도 작고 값도 크지 않은데 없으면 작업이 멈춥니다.
- 접이식 발판(2~3단): 사다리는 공구라기보다 안전장비입니다. 흔들리는 의자 위에서 조명 다는 것이 초보 사고의 단골 원인입니다.
- 보안경·방진마스크·용도 표기가 명확한 작업장갑: 이건 반드시 두 번째 묶음 안에 넣으세요. 뚫고 갈고 뜯는 작업이 시작되는 단계라서 그렇습니다.
빌리는 게 나은 것, 사야 하는 것
기준은 단순합니다. 1년에 두 번 이상 쓸 것 같으면 사고, 아니면 빌린다. 그리고 세 번 빌렸으면 그때 산다.
빌리는 쪽이 대체로 유리한 것: 콘크리트 타공용 해머드릴, 원형톱·직소·각도절단기, 습식 타일커터, 고압세척기, 큰 사다리와 작업대, 집진기. 공통점이 있습니다. 부피가 크고, 보관이 번거롭고, 1년에 한두 번 쓰고, 잘못 쓰면 크게 다칩니다.
대여처는 공구 대여 전문점과 일부 철물점이 일반적이고, 지역에 따라 주민센터나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공구 대여를 운영하는 곳도 있습니다. 다만 운영 여부와 조건은 지역·관리주체마다 다르니 미리 확인하세요. 빌리기로 했다면 그날 할 일을 몰아서 배치하고, 처음 쓰는 전동공구는 사용법과 방호장치를 확인한 뒤 남는 자재에 먼저 한 번 시험해 보세요.
사는 쪽: 매번 쓰는 손공구, 개인 안전장비(장갑·보안경·마스크는 남의 것을 쓰기 곤란합니다), 검전기처럼 상태를 내가 알고 있어야 하는 판단 도구, 그리고 소모품.

싸도 되는 공구, 돈을 써야 하는 공구
싸도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잃어버리기 쉬운 것(커터칼, 줄자, 헤라, 붓)과 한 번 쓰고 마는 소모품. 여기에 돈을 쓰면 대개 아깝습니다.
반대로 값을 아끼면 안 되는 건 세 가지입니다.
- 힘을 받는 것 — 스패너, 플라이어, 렌치. 무른 공구는 볼트 머리와 너트 모서리를 뭉갭니다. 뭉개진 너트 하나 때문에 부속 전체를 갈아야 하면, 아낀 값의 몇 배가 나갑니다.
- 안전에 직결되는 것 — 검전기, 발판과 사다리, 보안경, 용도가 명확히 표기된 장갑. 여기서 아낀 돈은 아낀 게 아닙니다.
- 정확도가 결과를 만드는 것 — 수평자와 줄자. 삐뚤어진 선반은 다시 뚫어야 하고, 잘못 뚫은 자국은 벽에 그대로 남습니다.
특정 브랜드를 고르실 필요는 없습니다. 용도·규격 표기가 명확한지, 손에 쥐었을 때 흔들림이나 유격이 없는지만 보셔도 실패는 크게 줄어듭니다.
공구가 있어도 하면 안 되는 일
공구를 늘리는 만큼 선도 같이 그어두셔야 합니다.
- 전기: 조명 기구나 스위치·콘센트 커버 교체 정도까지가 일반적으로 개인이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범위입니다. 분전반(두꺼비집) 내부 손질, 배선 증설·이설, 회로 추가는 유자격자·등록 업체의 영역입니다. 관련 규정과 건물 관리주체의 방침이 다를 수 있으니 반드시 확인하세요. 작업 전에는 해당 회로 차단기를 내리고 검전기로 확인하되, 검전기는 어디까지나 보조 도구이지 안전을 보증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 가스: 가스배관, 보일러 연통과 연소기는 스패너가 있어도 손대지 마십시오. 자격자 영역이고, 누출 사고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 높은 곳: 키를 넘는 높이는 혼자 올라가지 않기. 발판은 평평한 바닥에, 최상단은 딛지 않기.
- 고온·화학: 열풍기와 인두는 화상·화재 위험이 있습니다. 곰팡이 제거제나 강한 세정제는 환기하면서 쓰고, 서로 다른 약품을 섞지 마세요. 염소계와 산성 제품이 만나면 유독가스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장갑과 보안경은 이때도 필수입니다.
세 번째 10만원은 '내가 자주 한 일'이 정한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정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대신 방법을 드리겠습니다. 반년 동안 집에서 손댄 일을 휴대폰 메모에 한 줄씩만 적어보세요. 날짜와 무슨 일이었는지, 그거면 충분합니다.
반년 뒤 그 목록을 보면 자기 집의 패턴이 보입니다. 욕실 실리콘과 배수구가 잦은 집이 있고, 조명·스위치가 잦은 집이 있고, 선반과 가구가 잦은 집이 있습니다. 세 번째 묶음은 그 패턴이 정합니다. 실리콘이 잦았다면 마감 도구와 곰팡이 대비 자재 쪽으로, 목공이 잦았다면 클램프와 각도자 쪽으로, 조명이 잦았다면 배선 정리 도구 쪽으로 가면 됩니다.
공구는 취미로 모으기 시작하면 지출이 되고, 실제로 한 일에 맞춰 늘리면 자산이 됩니다. 첫 10만원은 겁내지 말고 지르시고, 두 번째 10만원은 손이 아쉬울 때 채우시고, 세 번째부터는 기록이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 그렇게 3년쯤 지나면 가방은 작은데 안 되는 일이 별로 없는, 제일 좋은 상태가 됩니다.
자주 묻는 질문
공구 세트를 사는 건 무조건 손해인가요?
세트라고 다 나쁜 건 아닙니다. 드라이버나 비트처럼 같은 계열을 사이즈별로 묶은 세트는 낱개로 모으는 것보다 유리한 경우가 많습니다. 문제는 성격이 다른 공구를 잡다하게 묶은 대형 세트입니다. 이런 구성은 실제로 쓰는 비중이 낮고, 가짓수를 맞추느라 정작 자주 쓰는 물건의 품질이 아쉬워지기 쉽습니다. 같은 계열 묶음은 세트로, 성격이 다른 공구는 필요할 때 하나씩 사는 쪽을 권합니다.
전동드릴은 처음부터 사야 하나요?
첫 묶음에는 넣지 않기를 권합니다. 처음 반년 동안 하게 되는 일은 대부분 나사를 풀고 조이고 조립하는 수준이라 손공구로 충분합니다. 가구 조립이나 앵커 작업이 반복되기 시작하면 그때 가벼운 충전 드릴드라이버를 들이면 됩니다. 콘크리트 벽 타공은 해머 기능이 필요한 별개의 장비이고 소음·분진·매입 배관 손상 위험도 있으니, 사기보다 빌리거나 시공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맡기는 쪽이 안전합니다.
공구는 어디서 빌릴 수 있나요?
공구 대여 전문점이 가장 일반적이고, 일부 철물점에서도 대여를 해줍니다. 지역에 따라 주민센터나 지자체,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공구 대여를 운영하는 곳도 있습니다. 다만 운영 여부와 품목, 보증금·기간 조건은 지역과 관리주체마다 다르니 미리 확인하셔야 합니다. 빌릴 때는 그날 할 작업을 몰아서 배치하고, 처음 쓰는 전동공구라면 사용법과 방호장치를 확인한 뒤 남는 자재에 한 번 시험해 보고 시작하세요.
검전기는 초보에게도 꼭 필요한가요?
조명이나 콘센트·스위치 커버를 만질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선순위가 높습니다. 차단기 표시가 실제 회로와 다르게 붙어 있는 집이 드물지 않아서, 내렸다고 안심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검전기는 보조 확인 도구일 뿐 안전을 보증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사용 전 살아 있는 콘센트에서 정상 반응이 나오는지 스스로 점검하고, 분전반 내부나 배선 증설·이설은 검전기가 있어도 유자격자·등록 업체에 맡기셔야 합니다.
초보는 저렴한 공구와 비싼 공구 중 어느 쪽을 사야 하나요?
품목별로 나누는 게 맞습니다. 잃어버리기 쉬운 것(커터칼, 줄자, 헤라, 붓)과 한 번 쓰고 마는 소모품은 저렴한 것으로 충분합니다. 반대로 힘을 받는 공구(스패너·플라이어·렌치), 안전에 직결되는 것(검전기·발판·보안경·장갑), 정확도가 결과를 좌우하는 것(수평자)은 값을 아끼지 않는 편이 결과적으로 덜 듭니다. 무른 공구가 너트를 뭉개면 부속 전체를 교체하게 되니까요. 다만 비싸다고 안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니, 브랜드보다 용도·규격 표기와 손에 쥐었을 때의 유격을 먼저 보세요.
※ 본문의 자재비·시공비는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 범위이며, 실제 가격은 지역·시기·업체·제품 사양에 따라 다릅니다. 구매·시공 전 반드시 현재 시세를 직접 확인하세요.